고성 어명기 고택에서 만난 단정한 삶의 품격과 세월의 고요

봄비가 갠 뒤의 아침, 고성 죽왕면의 시골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습니다. 길 양옆으로 논물이 반짝였고, 산 안개가 살짝 내려앉은 들판 너머로 기와지붕 몇 채가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오래된 나무 대문이 굳건히 닫혀 있는 고택이 나타났습니다. 이곳이 바로 조선 후기 문신 어명기의 삶과 학문이 깃든 ‘고성 어명기 고택’이었습니다. 담장은 낮고 돌로 단단히 쌓여 있었으며, 대문 위의 현판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 나무 향과 흙냄새가 섞인 공기가 흘러나왔고, 정갈한 마당 한가운데 고목 한 그루가 고요히 서 있었습니다. 첫인상부터 단정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집이었습니다.

 

 

 

 

1. 죽왕면 들길 따라 이어지는 접근

 

고성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 해안선을 벗어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어명기 고택’ 이정표가 보입니다. 좁은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돌담이 이어진 마을길 끝자락에 고택이 자리합니다. 주차장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마련되어 있고, 걸어서 2분이면 대문 앞에 닿습니다. 주변은 조용한 농가 마을로, 바람에 벼 잎이 부드럽게 흔들렸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와지붕의 선이 유난히 곱고 낮았습니다. 방문하던 날에는 새벽비가 살짝 내려 지붕의 빗물이 처마를 따라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집의 숨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을 자체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2. 고택의 구조와 건축미

 

고성 어명기 고택은 ㄱ자형 사랑채와 ㅁ자형 안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강원 영동 지역의 양반가 구조를 따릅니다. 돌기단 위에 세워진 목조 건물은 단단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앞마당을 향해 열려 있으며, 기둥과 대들보의 연결부가 정교하게 짜였습니다. 기와는 세월에 바래 은은한 회색빛을 띠고, 처마 끝에는 빗물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안채는 다소 높게 자리해 마당 전체를 내려다보는 형태였고, 대청마루는 사방이 트여 있어 바람이 잘 통했습니다. 문살 하나하나에도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조선 후기 상류 주택의 품격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3. 어명기의 생애와 고택의 역사

 

어명기(魚命基, 1718~1791)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특히 청렴하고 곧은 성품으로 지역의 존경을 받았으며, 학문을 가르치던 강학소로도 이 고택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고택은 18세기 중반에 지어져 25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보존되어 왔습니다. 사랑채는 외부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내부에는 서책과 문방도구를 복원 전시해 놓았습니다. 안채는 가족의 생활공간이자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자리로, 마루 한켠에는 당대 학자들의 글씨가 새겨진 목패가 걸려 있습니다. 이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학문과 덕을 실천하던 공간이었습니다.

 

 

4. 세심히 관리된 생활의 흔적

 

고택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습니다. 기둥의 도색은 자연스럽게 빛이 바랬지만 균열이 없었고, 마루와 처마의 목재는 정기적으로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반원 형태로 놓여 있었고, 뒤편의 텃밭에는 봄철 채소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랑채 옆에는 우물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생활 방식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청의 발이 살짝 흔들리며 나무의 향을 퍼뜨렸습니다. 관리인 한 분이 마루를 쓸며 “이 집은 손때가 남아 살아 있는 집 같다”고 했습니다. 과하지 않은 손길 속에서 집의 원형과 생활의 온기가 함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5. 주변 명소와 함께 둘러보기

 

어명기 고택을 둘러본 후에는 차로 10분 거리의 ‘청간정’을 찾았습니다. 동해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의 정자에서 탁 트인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성 왕곡마을’로 이동하면 전통 한옥이 밀집한 마을을 걸으며 조선시대 생활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점심은 ‘죽왕막국수촌’에서 막국수와 감자전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암사’에 들러 산속의 고요한 절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명기 고택을 중심으로 하루를 계획하면, 고성과 강원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완성된 코스가 됩니다.

 

 

6. 방문 팁과 계절별 추천

 

고성 어명기 고택은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봄에는 매화와 살구꽃이 담장 위로 피어나 집 전체가 화사해지고, 여름에는 나무 그늘 덕분에 마당이 시원합니다.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감잎이 돌담 위에 떨어져 가장 운치 있는 계절이 됩니다. 겨울에는 지붕 위로 내린 눈이 기와선을 따라 고르게 쌓이며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연출합니다. 방문 시에는 내부 전시물에 손을 대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용히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루에 앉아 잠시 머물면, 조선의 학자가 느꼈을 바람과 생각의 깊이를 함께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고성 어명기 고택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함 속에 진심과 품격이 깃든 공간이었습니다. 돌담과 나무, 마루와 하늘빛이 한데 어우러져 조선의 생활미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집 곳곳에 스며든 세월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그 속에서 어명기의 청렴한 성품이 자연스레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기둥을 스칠 때마다 집이 조용히 숨 쉬는 듯했고, 그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다시 찾는다면 가을의 오후, 햇살이 담장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는 시간에 오고 싶습니다. 고성 어명기 고택은 조선의 정신과 일상의 미학이 함께 깃든, 살아 있는 국가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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